Ⅰ. 들어가는 말: 일본 평화론 대계
일본은 여느 나라보다 ‘평화’(平和)라는 말을 자주 한다. 1945년 패전 이후 군국주의를 벗어나고 적어도 헌법상으로는 평화주의의 길을 걸으면서 그런 경향이 커졌다. 학계는 기존 천황제에 담긴 수직적 일방주의에서 벗어나면서 일본 사회를 좀 더 객관적인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메이지 시대 이래 천황제에 기반한 군국주의적 지배가 전쟁을 가져왔다는 반성과 함께 원자탄 피폭이라는 가공할 위력을 직접 체험한 뒤 평화에 대한 상상이 좀 더 본격화되었다.
물론 전쟁 이전에도 평화에 대한 상상은 있어왔고, 이러한 상상을 담론화하려는 시도도 지속되어 왔다. 이 글의 핵심이기도 하거니와, 요약하자면, 메이지 시대부터 전후에 이르는 일본의 주요 사상가들에게 평화는 ‘비전(非戰)’, ‘반군국주의(反軍国主義)’, ‘비핵(非核)’으로 대변되는 이상적 가치였다. 전쟁을 통한 군국주의적 팽창과 그로 인한 무력적 살상을 반대하면서 각종 물리적 폭력의 가능성을 줄이거나 없애기 위한 메시지가 일본적 평화 담론의 요지였다. 나아가 일본의 전쟁 책임을 반성적으로 의식하고, 핵무기와 같은 전쟁 병기를 거부하면서, 20세기 후반에는 전쟁포기를 선언한 ‘헌법9조’ 수호 운동 및 반핵으로 확장되어가는 중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그런데 평화를 비전, 반군국주의, 반핵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현실에서는 전쟁, 군국주의, 핵발전 등 그 반대의 흐름이 더 컸다는 뜻이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메이지 시대부터 패전 때까지 78년 동안, 청일전쟁, 러일전쟁, 두 번의 세계대전은 물론 각종 출병이나 사변이라는 명목 하에 이루어지는 교전이 끊이지 않았다. 전쟁기에 군부는 거의 특권적인 지위를 누렸고, 전쟁은 정당화되었으며, 나아가 정의로운 것으로까지 치부되었다. ‘국가를 위하여’라는 구호 아래 ‘거국일치’의 목소리가 지배적이었다.
그러한 경향은 패전 이후에도 남아 있어서, 아시아 전역을 지배해가던 과거에 대한 향수가 지금도 보수 우익 세력을 중심으로 꿈틀거리고 있다. 이들은 패전과 함께 제정된 「일본국헌법」(이른바 평화헌법) 제9조의 ‘전쟁포기’[戰爭放棄]와 ‘전력불보유[戰力不保持]’ 규정이 일본의 자위권을 침해한다며 헌법의 개정을 시도하고 있다. 1954년 자위대 창설 이후 고이즈미(小泉純一郎) 정권에서 법제를 정비해 군사국가로의 길을 열고, 아베(安倍晋三) 정권을 지나며 ‘힘에 의한 평화론’이 득세하고 있다. 아베 정권은 헌법, 특히 제9조를 폐지하는 데 속도를 내고 있다.
물론 과거 지속적인 전쟁의 와중에도 반전의 목소리가 이어졌듯이, 전쟁포기와 전력불보유의 원칙을 고수하며 “헌법9조를 지키는 모임” 같은 시민운동도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비’전(非戰), ‘반’군국주의(反軍国主義), ‘비’핵(非核)에 담긴 부정[非], 반대[反] 등의 언어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에서의 평화 담론은 현실화하고 있는 물리적, 특히 군사적 힘의 확대를 경계하고 비판하면서 오늘도 지속되고 있는 중이다. 비록 평화 혹은 그에 해당하는 목소리가 주류였던 적은 없지만, 평화를 향한 선구적인 제안들이 음으로 양으로 사회의 흐름에 방향성을 제시하면서 점차 전쟁과 같은 무력의 부당성을 고발하고 축소시키는 데 공헌해왔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저간의 사정과 상황을 염두에 두고서 일본 내 평화 개념의 역사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일본에서는 평화 혹은 그에 상응하는 언어와 가치를 누가 어떻게 사용하고 계승해 왔는지 알아보려는 것이다. 평화라는 언어의 내용, 즉 평화 개념의 변천사를 고찰하는 것은 언어가 단순히 역사적 사건을 해설하는 수단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 실재를 구성하는 사실상의 내용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전제한다(나인호, 2011: 13-15). 평화 개념의 역사를 고찰함으로써 평화 또는 그에 상응하는 언어를 구사하던 이들이 추구하던 세계, 품었던 열망, 세계 해석 방식 등을 읽을 수 있다. 동시에 비전, 반군국주의, 반핵에 담긴 반대와 비판의 언어는 전쟁, 군국주의, 핵무기와 같은 폭력적 현실에 대한 정치·사회적인 저항의 표현이기도 하다. 평화 개념의 역사를 통해 정치와 사회의 역사를, 궁극적으로는 일본적 정신사의 단면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이를 위해 일본 평화론의 기념비적 역작인 20권짜리『日本平和論大系』(日本圖書センター, 1993-1994)에 등장하는 평화론 주창자들의 사상에 좀 더 초점을 맞출 것이다. 저명 역사학자인 이에나가 사부로(家永三郞, 1913-2002)가 책임 편집한 이 책에서는 일본에서 평화 내지 평화 관련 메시지를 주창한 주요 인물의 저작이나 작품을 선별해 해설과 함께 소개하고 있다. 이 방대한 저작은 일본에서 평화가 어떻게 상상되었고 주창되었는지, 그 다양한 주장들의 대계를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20권의 세부 목차만 훑어보더라도, 일본의 평화주의자들은 대체로 제국주의, 군국주의, 자본주의, 독재정치 등을 비판하고, 자유, 민권, 사회주의, 기독교 등에 입각한 비전 혹은 반전, 징병거부 등의 목소리를 높였음을 알 수 있다. 나아가 전후에는 헌법(특히 제9조) 수호 운동 및 반핵 혹은 탈핵 등으로 평화의 범주가 구체화 및 세분화하며 확장되어왔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특히 사회주의자와 기독교 평화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천황제 하에서는 평화가 불가능하다며 천황제 폐지를 평화주의의 이름으로 거론하는 사례도 돋보인다.
일본 사회 전체를 놓고 보면, 이러한 입장은 소수였고, 목소리도 상대적으로 작았지만, 울림은 강했고, 무엇보다 지속적이었다. 이런 사실이 일본 평화 개념사를 정리하는 이 글의 요지이자 결론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일본적 평화 개념의 역사를 정리해보도록 하겠다.
Ⅱ. 일본 평화론의 씨앗, 메이지 이전
일본적 평화 사상의 기원은 쇼토쿠태자(聖德太子, 574-622)의 「십칠조헌법」(十七條憲法, 604)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십칠조헌법」은 불교적 세계관에 입각해 ‘화’(和)를 강조하며 작성된 일본 최초의 성문헌법이다. 「십칠조헌법」 제1조가 “화를 귀하게 여긴다”(以和爲貴)로 되어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화’는 헌법의 기본 이념이었다(憲法硏究会編, 1964: 69). 이때의 ‘화’는 간단하게 규정하면 멸사봉공(滅私奉公)을 통해 이루어지는 집단주의적 질서이다. 가령 제3조에서는 “군주는 하늘이고 신하는 땅”이라 규정하고, 제15조에서는 “사(私)를 등지고 공(公)을 향하는 것이 신하의 도리”라고 규정하고 있다. 정리하자면, 개인성을 제한하고 공적인 영역을 추구할 때 얻어지는 집단주의적 질서가 ‘화’이며, 그 정점에 군주(천황)를 둔 법체계인 것이다. 멸사봉공을 통해 얻어지는 ‘화’의 정신으로 호족들의 관계를 정당화하고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수직적 질서를 구축하려 했던 셈이다. 이 헌법이 일본 중앙집권제의 출현을 알린 다이카개신(大化改新, 646)의 정치적 이념이 되었으니(정형, 2009: 81), 「십칠조헌법」의 ‘화’가 7세기 고전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일본 평화론의 원류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모든 이가 헌법의 규정, 즉 멸사봉공으로서의 ‘화’를 실천했던 것은 아니다. 계급사회를 전제한 집단 질서로서의 평화는,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한편에서는 사회적 안정으로 나타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에 대한 억압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현실은 전체적으로 후자 쪽에 가까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위계적 질서와 수직적 신분사회에 기초한 민중에 대한 억압을 비판하면서, 이상적 공산사회에 가까운 내용을 선구적으로 주창한 인물이 있다. 16세기의 안도 쇼에키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17세기 인물인 요코이 쇼난에게서는 현실적 힘을 추구하면서도 전쟁을 거부하던 사례를 볼 수 있다.
일본에서 근대적 의미의 평화의 단초는 도쿠가와 막부 시절의 안도 쇼에키(安藤昌益, 1703~62)에게서 잘 드러난다. 안도 쇼에키는 일본 민본 사상의 선구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무가(武家)계급을 중심으로 하는 무력적 신분사회를 비판하고, 농민을 평화의 담지자로 보았다. 무사가 지배하는 무력적 신분사회를 ‘법세(法世)’로, 신분 차별이 없는 세상을 ‘자연세(自然世)’로 명명했다. 땀 흘려 생산에 종사하지 않으면서 착취로 먹고 사는 불경탐식(不耕貪食)을 비판하고, 자연의 이치에 따라 스스로 경작하며 사는 ‘직경(直耕)’을 중시했다. 남녀, 귀천, 빈부는 호성(互性)을 지니기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차별하고 지배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지배계급에 따른 탐욕적 상업 활동이 전쟁을 일으킨다면서, 신분 차별이 없고 탐식이 없으며, 자연세의 직경이 주류가 되는 세상을 꿈꾸었다. 나아가 전쟁과 같은 무력과 군학(軍學)을 비판하고, 계급적 지배체제를 부정하면서 철저한 군비철폐론을 주창했다. 직경의 이념을 근간으로 하는, 이상적 공산사회와 비슷한 공동체를 꿈꾸었다(北島義信, 2017: 113-127). 모두가 자연의 원리에 따라 살면서 서로 차별하지 않는 상태가 안도 쇼에키의 평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안도 쇼에키가 이상적 평화론의 주창자였다면, 그보다 100년 후 인물인 요코이 쇼난(橫井小楠, 1809~69)은 평화 담론에 좀 더 구체성을 입혔다. 메이지 시대 직전의 진보적 정치가였던 요코이는 부국강병론에 입각한 전쟁폐지론을 주장했다. 사상가인 안도가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비판했지만, 정치가 요코이는 부국의 현실화를 위해 당시 이상 국가들처럼 여겨졌던 영국, 미국, 러시아 등과의 교역을 중시하며 일본의 경제발전을 도모했다. 경제가 발전하려면 사적인 관심에 치중하던 막부(幕府) 혹은 번(藩) 체제를 극복하고, 정치적 차원에서 궁극적으로 여러 번 체제를 통일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당시 도쿠가와 막부가 자신의 이익에만 골몰한다 비판하고서, 공공의 정신으로 민중을 위한 정치를 해야 하고, 신의를 바탕으로 교역하며, 번과 민 모두의 이익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음과 같은 말이 그의 입장을 요약한다: “천덕(天德)을 따르고 만국의 실정을 알고 국내정치를 충실하게 하고 부국강병의 성과를 올려 외국의 침략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橫井小楠, 1986: 156) 요즘 언어로 하면 ‘힘에 의한 전쟁 예방’이 그가 말하는 평화인 셈이다. 부국강병을 추구하되, 전쟁은 거부한다는 것이다. 상황에 따라서는 정의의 이름으로 전쟁도 불사하는 입장에 비하면, 힘을 추구하지만 전쟁은 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오늘날 얘기하는 평화에 더 다가섰다고 할 수 있다. 요코이의 사상은 ‘힘에 의한 평화’의 일본적 원조이되, 전쟁을 하지 않을 조건에 좀 더 관심을 두었다는 점에서 평화학적 의미가 적지 않다.
Ⅲ. 메이지 전후의 평화론, 대국으로의 길과 민권운동
이들을 지나 메이지 유신(1867~) 이후 제2차 대전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유력한 사상가들에게서 드러나는 평화론은 ‘반전(反戰)’, ‘비전(非戰)’, ‘염전(厭戰)’, ‘반군국주의’, 그리고 ‘병역거부’ 등의 키워드로 요약할 수 있다. 가장 일반적인 언어로 정리하면, 역시 ‘반전’혹은 ‘비전’이라 할 만 하다.1) 전술했던『日本平和論大系』(日本圖書센터, 1993-1994)의 목차에서도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들이기도 하다. 물론 당시의 평화 개념을 ‘반전’ 관련 키워드로 정리할 수 있다는 말은 현실적으로는 전쟁, 군국주의 등 일본의 대외적 팽창론이 대세를 이루어왔다는 뜻이다. 이러한 대세가 공식화된 시점은 아마도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 1825-1883) 사절단의 보고서일 것이다.
1871년부터 2년간 이와쿠라 토모미(岩倉具視)를 필두로 미국과 유럽 12개국을 순방하고 돌아온 일명 ‘이와쿠라 사절단’은 당시 프로이센(독일)이 소국에서 대국으로 변모해가는 과정을 보고 들으면서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국제적 환경에서 살아가려면 대국의 문명을 수용하고 힘에 의한 군사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보았다. 유럽의 소국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긴 했지만, 이와쿠라 사절단은 기본적으로 일본이 대국주의의 길을 걷도록 공식화시킨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야가사키 히데노리, 2004: 197-201; 田中彰, 1999: 39-41).
이미 1860년에 사절단의 일원으로 미국을 다녀왔던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 1834-1901)는 ‘힘이 정의’라는 취지 하에 일본의 대국주의화 및 대외침략 논리를 제공했다. 후쿠자와는 「탈아론」(脫亞論, 1885)에서 “마음으로부터 아시아 동방의 악우(惡友)를 사절”하고 서구식 문명개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뒤 1894년 실제로 일본이 한반도에서 대륙침략을 위해 청일전쟁을 벌였을 때, 그는 이 전쟁을 “문명”국인 일본과 “야만”국인 청국의 싸움, “진보를 기도하는 자”인 일본과 “진보를 방해하는 자”인 청국의 싸움으로 이해하는 신문(「時事新報」) 사설을 쓴 바 있다.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峰, 1863-1957)는 더 노골적이었다. 그는 청일전쟁이 “3백년간 수축적이던 일본이 일대 비약을 하여 팽창적 일본이 되는 기회”라고 보았다. 인구도 급격히 증가하고 있으니 부국강병책으로 향후 60년 내에 국토 면적을 두 배 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마땅히 상향해야 할 것은 군 기관의 확장과 함께 생산 기관의 발달을 병행 병진시킬 뿐이다. 강병, 부국은 어느 하나가 결여되어서도 안 된다. 부국을 망각하여 강병에 전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복음이 힘이 아니라 힘이 오히려 복음이라는 것을 알았다. 즉 모든 정리(正理), 공도(公道)를 행하는 것도 힘이다. 모든 부정, 무도(無道)를 파기하는 것도 힘이다. 힘이 없어서는 복음도 그 빛을 일어버린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이상의 인용은 야가사키 히데노리, 2004: 202, 204, 205)
이러한 일본팽창론은 당시 대다수 일본인을 기대와 환호로 몰아넣었다. 1895년 1월에 창간된 「태양」(太陽), 11월에 창간된 「동양경제신보」(東洋經濟新報), 1896년 7월에 창간된 「세계의 일본」(世界之日本) 등에서는 일본의 대외적 팽창을 고취시키는 기사를 내보냈고, 도쿠토미가 주재하는 「국민신문」(國民新聞)의 발행부수는 1904년 러일전쟁 시기에 한꺼번에 4배에 가깝게 신장했다. 일본의 대국주의 혹은 대일본주의에 본격 시동이 걸린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류 현실을 비판적으로 의식하면서 그 반대의 목소리들도 속속 등장했다. 가령 메이지 유신 이후 청일 전쟁 이전 시기(1870~80년대)에는 징병령(徵兵令)(1873년)에 대한 반대운동이 전국적으로 고조되기도 했다. 징병령을 반대하는 이론 가운데 하나가 나카에 초민과 우에키 에모리 등이 내세운 자유 민권 운동이었다.
나카에 초민(中江兆民, 1847-1901)은 일본의 대표적인 자유민권론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프랑스 유학 이후 서구식 민주주의에 눈뜨면서 자유와 평등, 주권재민 등의 개념을 체득했다. 한 때는 정계 진출을 꿈꾸며 일본의 국가주의적 행동에 참여하기도 하고, 대륙침략을 지원하는 단체를 지원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국가주의의 확대로 인한 국민의 자유와 평등이 침해받는 모습 때문에 고뇌했다(채수도, 2007: 223). 그런 뒤 설령 조선의 정치에 개입하더라도 조선이 진보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일본과 조선의 우호적 관계를 원했다. 중국과 연대해 침략적 팽창주의를 저지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무엇보다 나카에는 메이지 정부의 징병제도와 상비군제도를 비판했다. 징병제는 인민에 부담을 주고 빈민을 희생시키며 특정 계층이 무기를 독점해 국가 전체가 위험해질 수 있다는 논리에서였다(色川大吉, 1981: 99: 이경주, 2001: 151 재인용). 만일 군대가 필요하다면, 왕의 일방 지배를 받는 군대가 아니라, 국민의 주체성에 기초해 국민 스스로가 통제 가능한 토착병(土着兵) 제도여야 한다고 주장했다(松永昌三, 1990: 138-139). “외물(外物, 군사력)은 결코 인간의 근본도리(평화)를 이길 수 없다”면서, 무력이 아니라 학술을 진흥해 강국들이 감히 침범하지 못할 정신문화를 고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中江兆民, 1997; 이경주, 2001: 150 재인용).
일본의 군대는 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하며, 아시아의 평화는 일본의 평화와 직결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나카에의 평화론의 기초는 인간평등 사상에 입각해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는 데 있었다. 개인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희생을 강요할 수 없듯이, 국가도 자국의 이익을 위해 타국의 희생을 강요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 군비를 축소 내지 철폐하고 정신문화에 입각한 인간의 자유와 평등의 구현을 주장했다. 이런 맥락에서 ‘지구상 만국 일가족(地球上萬國一家族)’ 사상을 내세웠는데, 일본중심의 대동아공영권과는 다른, 일종의 평화주의적 범아시아주의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우에키 에모리(植木技盛, 1857-1892)도 나카에 초민과 비슷한 입장을 견지했다. 그는 인간 최고의 가치를 자유와 평등에 두고서, 주권재민적 민주주의를 추구했다. 주권재민에 반하는 천황제를 비판하면서, 대의정체(代議政体)를 위해 선출된 민선의원이 정치하는 입헌제 국가를 꿈꾸었다. 그는 민주주의적 헌법인 220개 조항의 「東洋大日本国国憲按」(1881)의 작성을 주도했다. 현실적으로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독일의 헌법을 모델로 작성한 천황중심의 내각제 헌법이 반포되고 실시되었지만(1889), 일본의 민주주의와 평화론 담론의 기초를 형성한 것은 우에키의 헌법안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일본 헌법사상의 원류이기도 하다.
우에키는 병기(兵器)를 흉기(凶器)로 보고서, 군대와 군비의 무용성을 주장했으며, 민주주의는 결국 ‘만국공의정부(万国共議政府)’의 건설을 통해 완성될 수 있을 것이라 보았다. 루소의 평화론을 소개하고, 칸트의 평화론을 높게 평가했던 그의 사상적 궤적이 만국공의정부의 건설에 대한 기대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Ⅳ. 청일전쟁기와 러일전쟁기의 반전 평화론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둘러싸고 중국(淸)과 일본이 대립하며 벌인 청일전쟁(日淸戰爭, 1894~1895년) 시기에는 기독교인(퀘이커)이었던 시인이자 평론가 기타무라 도코쿠(北村秀谷, 1868-1894), 의사이자 작가였던 가토 가즈하루(加藤万治) 등이 창립한 ‘日本平和会’(1889.3~ 1893.5)의 목소리가 돋보였다. ‘일본평화회’에서는 기관지로『平和』(1889.3.15.~ 1893.5.3.)를 발행했는데, 영어 peace가 일본과 한국에서 平和로 알려지게 된 중요한 계기였다.2) 창간호 간행사에서는 평화를 “세계가 올려다볼 더할 나위 없는 도덕의 문제”(家永三郞 外, 1993(1): 314)로 간주하면서, 기독교인으로 살면서 양심의 충실하다면 평화를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纐纈厚, 2009: 129). ‘일본평화회’는 일본에서 조직적인 평화운동의 시조로 평가되고 있다(家永三郞 外, 1993(1): 424).
기타무라를 계승한 작가 기노시타 나오에(木下尙江, 1869-1937)는 청일전쟁을 메이지 국가의 일방적 근대화 내지 서구화의 산물로 보면서, 전쟁을 부정하고[非戰] 탈군대주의적 민주주의의 길을 추구했다. ‘군대주의’는 인간을 무시하는 노예적 제도라는 것이었다(家永三郞 外, 1993(3): 436-437). 기노시타는 정치적 노력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지상에 건설한다는 기독교적 세계관을 강력하게 품었다. 기노시타도 마찬가지였지만, ‘일본평화회’를 이끈 이들은 모두 기독교인들로서, 메이지 시기 일본의 평화사상은 기독교인들의 참여로 부각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그러다가 러일전쟁을 전후하여 평화를 비전(非戰) 혹은 반전(反戰)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확대되었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조선의 종주권을 빼앗고 타이완과 랴오둥반도를 중국으로부터 얻었다. 하지만 러시아가 프랑스와 독일의 도움을 받아 일본의 대외 정책에 개입하면서(삼국간섭) 일본은 랴오둥반도를 청에 반환하게 되는 등 조선에 대한 지배가 여의치 않자, 1904년 2월 이른바 러일전쟁(日露戰爭, 1904~1905)을 개시했다. 이즈음 일본의 대다수 언론들은 만주에 주둔하던 러시아를 몰아내고 조선과 만주를 모두 확보하겠다는 정가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반영하며 ‘주전론’(主戰論)을 형성해갔다. 당시 “국가를 위해서”라는 들뜬 표어는 주요 언론들의 표제를 장악하기도 했다.
그러자 정부 정책에 반대하며 ‘반전으로서의 평화’를 요구하는 이들도 많아졌다. 전술했던 기노시타 나오에(木下尙江), 사회주의 운동가 아베 이소오(安部磯雄, 1865-1949),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 1871-1911) 등에 의한 비전(非戰) 사상이 발달했고, 반전시(反戰詩)들도 등장했다.3) 이들은 사회민주당을 결성해 계급제도의 철폐, 세계평화를 염원하는 운동을 펼쳤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사회민주당을 위험 정당으로 간주해 즉시 해산명령을 내렸지만, 평화운동은 도리어 확장되었다.
그 즈음 고토쿠를 위시하여 사카이 도시히코(堺利彦, 1870-1933), 기독교 사상가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 1861-1930)가 계몽주의 단체인 ‘리소단(理想団)’을 결성하고 「헤이민신문」(平民新問, 1903.11.15.-1905.1.29)을 창간했다. 비전(非戰)과 군비철폐를 모토로 하는 신문이었다. 러일전쟁은 물론 전쟁 자체를 반대하는 신문의 정신 때문에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5년 1월 폐간되었지만, 헤이민신문은 일본에서 ‘비전(非戰)으로서의 평화론’을 부각시키는 근간이 되었다.
이러한 비전론은 고토쿠와 사카이는 물론 그 뒤에 이시카와 산지로(石川三四郞, 1876-1956), 니시카와 고니로(西川光二郞, 1876-1940) 등이 개입하면서 평등주의, 사회주의, 평화주의와 연결되는 의미 있는 흐름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비전론(非戰論)과 반전사상을 일관되게 주장했다.
일본 평화사상사에서는 전술한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를 위시하여 사카이 도시히코(堺利彦), 가타야마 센(片山潛), 이시가와 산시로(石川三四郞) 등의 사회주의자들이 제기한 평화론이 가장 분명했고 실천적이었다. 이들은 일본의 주류 흐름이었던 천황사관(天皇史觀)이나 천황 절대주의(天皇 絶對主義)에 근거한 침략전쟁을 비판했는데, 이 가운데 돋보이는 사람은 고토쿠 슈스이이다.
고토쿠 슈스이의 반전사상은 당시 혁신적 평화개념을 잘 보여준다. 나카에 초민의『삼취인경륜문답』(三醉人經綸問答)을 읽으며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사상을 급진적으로 계승한 고토쿠의 입장은 「헤이민신문」창간호 게재문에서 잘 드러난다: “우리는 인류를 박애의 길로 이끌 평화주의를 창도한다. 따라서 인종의 구별, 정체의 이동(異同)을 막론하고 세계에서 군비의 철폐와 전쟁의 근절을 기대한다.” 여기에 담긴 그의 평화론은 ‘사회주의적 반전주의’라고 할 수 있다. 고토쿠는 이렇게 말한다: “만일 세계만방에 지주나 자본가 계급이 없고, 무역시장의 경쟁이 없고, 재부(財富)의 생산이 많아지면서도 그 분배가 공평해져서 사람들 각자의 삶이 즐거워진다면 누가 그런데도 군비를 확장하고 누가 그런데도 전쟁을 하려고 하겠는가. 이 비참한 재액죄과(災厄罪過)가 일소되어야 사해동포의 이상이 비로소 실현된다고 할 것이다. 사회주의는 한편에서는 민주주의인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위대한 세계평화주의를 의미한다.”(이경주, 2001: 154 재인용)
고토쿠도 처음에는 조선을 탐내는 러시아를 비판하며 러시아가 조선의 분할을 주장한다면 일본은 러시아에 맞서서 싸워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환자를 위해 극약(劇藥)이 있는 것이 어쩔 수 없는 것처럼, 불완전한 병적인 사회에 군비와 전쟁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채수도, 2007: 227 재인용)는 입장이었다. 그러다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내각의 번벌정치가 인민의 자유와 인권을 유린하는 데 반발하면서 새로운 정치를 꿈꾸었고, 그 새로운 정치의 핵심을 비전론(非戰論)에 두었다(채수도, 2007: 228). 그는 말한다: “우리들은 결코 비전론을 멈추지 않는다. 우리들은 비전론을 위해 어떠한 증오, 어떠한 조소와 조롱을 당해도, 어떠한 공격과 박해를 받아도 결코 우리들의 비전론을 그치지 않을 것이다.”(「平民新聞」(1904.12.18. 社說) 청일전쟁 이후 급속히 확대되던 일본의 경제를 다시 전쟁으로 확장시키려 하다가는 언젠가 미국과도 전쟁하게 될 것이라며 비판적인 경고도 했다.
그는 『20세기의 괴물 제국주의』(廿世紀之怪物·帝国主義)에서 제국주의의 두 축을 ‘애국심’과 ‘군국주의’로 규정하며 비판했다(家永三郞 外, 1993(2): 17-50). 특히 애국심의 본질을 증오, 허과(虛誇), 허영(虛榮)이라는 미신으로 보고서(家永三郞 外, 1993(2): 18-26), 애국의 이름으로 그 흐름 밖에 있는 입을 봉쇄하고 타자의 자유를 억압하는 태도를 비판했다. 제국주의의 건설은 절취강도(竊取强盜) 행위라며(家永三郞 外, 1993(2): 51), 제국주의적 행태를 싸잡아 거부했다. 애국심의 본질은 두터운 동정과 측은지심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청일전쟁에서 얻은 배상금으로 군비를 증강하고 대국주의의 길로 나서는 일본을 비판하며 소국주의(小國主義)를 주장하였다. “군국주의가 하루 행해지면 국민의 도덕은 하루 부패한다”면서, 나카에 초민이 강조한 소국주의를 계승했다. 고토쿠에게 평화는 서구 열강이 추구하는 제국주의적 대국주의가 아니라, 비전론(非戰論)에 기반해 이웃 국가와 연대하는 소국주의의 실천이었다(오가와 하루히사, 2004: 257-258). 일본 최초로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을 일본어로 번역했던 고토쿠는 천황 암살을 모의했다가 1911년 사형을 당했다.
비슷한 시기 아베 이소오는 “만일 평화가 인도라면, 평화를 세계에 선언하고서 그것을 위해 나라가 망한다 해도 좋지 않겠느냐”(“非戰論演說会の記” 「平民新聞」第1号; 家永三郞 外(2): 88-94)고 말한 바 있는데, 국가보다 평화를 내세웠던 아베 이소오도 고토쿠와 비슷한 관점을 공유했다고 할 수 있다. 아베 이소오는 물론이거니와, 확고한 반전사상에 입각한 고토쿠의 군비 철폐 운동, 보편적 인류애에 따른 탈계급 의식, 계급 타파와 공평한 분배 구조의 확립, 사회적 약자 지향적 관점, 자유·평등·박애를 근간으로 하는 「헤이민신문」의 주도적 창간 등은 그의 평화관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사회주의자와 함께 일본에서 평화 담론을 부각시킨 다른 한 축은 잠깐 전술했지만 기독교도였다. 그 대표 인물이 우치무라 간조이다. 우치무라를 위시한 기독교의 평화론에 대해 알아보자.
한국에서도 정신적 제자가 많은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 1861-1930)는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대표적인 전쟁폐지론자였다. 처음부터 철저한 전쟁폐지론자였던 것은 아니다. 그도 청일전쟁을 이른바 의전(義戰)으로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중국(청)이 조선을 예속화하면서 동양의 진보를 방해하고 있으니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라도 청과의 전쟁은 불가피하다 보기도 했다. “일본과 중국 양국의 관계는 새로운 문명을 대표하는 소국과 구문명을 대표하는 대국의 관계”(內村鑑三, 1982b: 32-34)이니, 소국의 신문명으로 대국의 구문명을 이끌어 인류의 진보를 앞당겨야 한다고 보았다. “일본이 세계에 이익 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평화와 진보와 개명을 제공하는 것을 그 방침으로”(藤井松一, 1968: 263) 일본이 동서양을 매개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內村鑑三, 1982a; 야가사키 히데노리, 2004: 212 재인용).
하지만 청일전쟁이 조선을 중국 종속에서 해방시키기는커녕 도리어 중국의 분할을 촉진하고 일본도 피폐해지는 모습을 보면서, 비전(非戰)주의자로 돌아섰다. 청일전쟁이 의(義)를 위한 전쟁이 아니라 주변국을 무시하고 일본의 사욕을 고취시키는 해적의 전쟁이 되었다는 것이다.
“전승국의 위치에 서자마자, 그 주안이었던 인방(隣邦)의 독립은 고사하고 오히려 신영토 개척, 신시장 확장으로 전국민의 주의를 빼앗아 단지 전승의 이익만을 충분히 얻으려고 한다… 왜 동포 중국인의 명예를 중요시하지 않는가. 왜 인방 조선국의 유도에 힘쓰지 않는가.”(內村鑑三, 1982c: 233)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 전쟁절대폐지론자이다. 전쟁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자고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대죄악이며, 대죄악을 범하고서 개인도 국가도 영원히 이익을 얻을 리 없다.”(家永三郞 外, 1993(4): 45)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소인이며, 자국중심적인 국민은 가장 퇴보하는 국민이다. 자국의 부강만을 구하고 타국의 이익을 돌보지 않는 국민이 부강을 이룬 것을 역사상 본 적이 없다.”(鹿野政直, 2005: 98) 그러면서 국가의 소명은 부국강병으로 인한 침략주의가 아니라, 화합을 통한 공동의 번영에 있다고 주장했다. “절대적 비전주의”야말로 “평화의 복음”이라는 것이다(家永三郞 外, 1993(4): 55).
이와 함께 또 한 사람의 기독교인 요시노 사쿠조가 추구했던 평화론의 의미와 한계에 대해서도 볼 필요가 있다.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 1878~1933)는 우에키 에모리(1857-1892)의 자유민권론과 에비나 단조(海老名彈正, 1856-1937)의 보편주의적 기독교 사상에 영향을 받으며 기독교 사회주의 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국민이 필요로 하는 바가 곧 정부의 기본 목표여야 한다면서 ‘민본주의’를 요구했다. 이를 실현하려면 보통선거권, 민간에 의한 군대의 통솔, 귀족원의 민선기구로의 전환, 사회주의 국가의 점진적 설립 등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국내 정치에 더 관심을 기울이면서 우치무라 간조 등에 비하면 일본의 한국과 중국 침략과 같은 국제적인 문제에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었다. 한국을 일본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의 일부로 상상하거나, 중국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도록 일본이 도와주어야 한다며, 한국 및 중국 지배를 정당화하기도 했다. 요시노의 입장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면, 전쟁이 없는 상태로서의 ‘소극적 평화’에 충실했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김경일, 2014: 40, 43), ‘전쟁 없는 식민지배’라는 안일한 생각에 머물렀다는 것은 그의 평화론의 한계를 잘 보여준다. 그는 분명히 반전주의자였지만, 전쟁만 하지 않는다면 식민지배도 서구적 근대화를 위해서는 가능하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한계가 뚜렷하다.
이러한 한계는 일본이 돌이키기 힘들 만큼 강력한 전쟁기로 접어들면서, ‘반전’의 요구조차 하기 힘든 상황이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일본이 1930년대 이른바 ‘15년 전쟁’으로 돌입하기까지의 상황을 정리하며, 당시의 평화 담론으로 이어가보도록 하자.
1차 대전 이후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 등 제국주의가 와해되고 해외에서 민주주의적 운동과 사조가 밀려오면서 천황제 중심의 정치에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의 3.1운동, 중국에서의 5.4운동 등도 일본이 아시아에서 쌓아올린 식민 세력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러시아 혁명 이후 세계적으로 코민테른이 형성되고 중국, 한국, 대만, 일본에서 공산주의 운동이 벌어지자, 일본에서는 1925년 치안유지법을 제정하고, 국내 질서를 강경하게 몰고 가면서 일종의 파시즘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배외주의적 흐름이 커가는 가운데 1930년대 들이닥친 세계적 대공황을 해결하기 위해 일본은 다시 전쟁의 길을 선택했다(다까하시 고하찌로 외, 1994: 293-296).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켰고, 1937년에는 중일전쟁이 벌어졌다. 사상가, 문인 등을 포함해 많은 이들이 전쟁을 지지하며 일본의 팽창주의를 응원했다. 그렇게 1930년대 일본에서는 군국주의가 급격히 진행되었다. 1945년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할 때까지 일본은 15년간 전쟁을 이어갔다.
하지만 이러한 흐름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도리어 반전(反戰) 운동도 다시 탄력을 받았다. 비록 전쟁 지지 세력이나 분위기에 비해서는 약했지만, 각종 반전 관련 자료들과 기록들이 쓰였고,4) 다양한 반전시도 등장했다. 일본에서 가장 많은 반전시를 남겼다는 시인 가네코 미쓰하루(金子光晴, 1895~1975)는 ‘전쟁’이라는 시에서 전쟁을 이렇게 규정했다: “전쟁이란 끊임없이 피를 흘리는 것이다. 그 흘린 피가, 헛되이 땅에 스며들고 마는 것이다.”(손순옥, 2017: 127-129 인용) 청일전쟁이 끝나던 해에 내어나서 러일전쟁과 중일전쟁, 그리고 두 번의 세계 대전 등 격변의 전쟁기에 살았던 가네코의 눈에 전쟁은 사람의 피를 무의미하고 무가치하게 쏟게 하는 것이었다. 전쟁은 인민의 사고를 정지시켜 전쟁 자체를 최고로 여기게 만드는 기계적 획일화이기도 했다. 시는 이렇게 비판적으로 이어진다: “전쟁이 생각하는 바에 의하면, 전쟁보다 이 세상에 훌륭한 것은 없다. 전쟁보다 건전한 행동은 없고, 군대보다 밝은 생활은 없으며, 또 전사보다 더 나은 명예는 없는 것이다. 아들이여 진정 기쁘지 않은가. 너와 나 이 전쟁 통에 태어난 것은. 열아홉의 자식도 오십의 아비도 똑같은 제복을 입고 똑같은 군가를 부르고…”(손순옥, 2017: 127-129)
폭력으로 점철되는 전쟁의 와중에서 누군가의 죽음과 부조리한 상처에서 아픔을 느끼며 저항 시인들은 많은 반전시를 남겨놓았다. 평화라는 이상적인 언어를 사용할만한 여유가 없던 때였던 만큼, 15년 전쟁 시기 일본 도처에서는 반전/비전, 반군사주의 등의 언어가 평화에 대한 기대를 대신하고 있었다. 이 때 ‘반전’을 넘어 ‘절대 평화론’으로 이어갔던 이도 있었다. 야나이하라 타다오와 같은 이였다.
우치무라의 비전론을 계승한 야나이하라 타다오(矢內原忠雄, 1893-1961)는 기독교의 복음주의적 전통과 예언자적 전통이 분리되는 것이 아니며, 국가와 개인이 분리되는 것도 아니라 보고서, 반전에 기반한 정의를 외쳤다(박은영 2017: 136). 만주사변 이후 연속적 전쟁의 기운을 느끼면서, 군국주의화하는 국가에 비판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진정한 신앙이자 애국이라고 보았다. 국민에 대한 국가의 강제력도 정의에 입각할 때에야 타당성을 지닌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정의는 사람들이 자신의 존엄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타자의 존엄을 옹호하는 것, 바꾸어 말하면, 타자의 존엄을 해치지 않는 한도에서 자신의 존엄을 존중하는 것”이었다(矢內原忠雄, 1963(18): 627). “국가가 정의를 지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가 국가를 지도해야 한다”면서, 정의는 국가를 넘어서는 ‘객관정신’이라고 보았다. 야나이하라는 정의라는 원칙이 발현하는 형식을 평화라고 이해했다(가노 마사나오, 2010: 280).
물론 일본으로 하여금 제국주의 자체를 단박에 포기하게 할 수는 없었지만, 피식민지의 참정권, 자주권, 인권을 존중해야 한다고 줄기차게 주장했다. 같은 기독교인이더라도 니토베 이나조(新渡戶稻造, 1862-1933) 같은 교육 사상가가 식민지를 완전히 본국화하는 동화정책을 당연시하기도 했지만, 야나이하라에게 “동화주의는 식민지에 대하여 완전히 동일한 대우를 부여하는 정책”이었다. 식민지 백성도 본국 국민과 동일한 자격, 신분, 즉 본국에서와 동일한 권리, 보장, 자유를 부여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법아래 평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정의의 신에 대한 신앙의 발로였다. 하느님 나라는 일본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었기에, 기독교인이 일본의 승리를 위해 기도하는 것 자체도 잘못이었다. 그는 자위나 정의를 위해서는 전쟁도 필요하다는 ‘상대적 평화론’을 거부했고, 전쟁은 자위를 위해서든 정의를 위해서든 그 자체로 반대한다는 ‘절대적 평화론’의 입장에 섰다(矢內原忠雄, 1963(19): 341; 박은영 2017: 150-151). 상대적 평화론은 자국의 이익을 위한 가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아가 인간의 ‘자위’(自衛)가 아닌 ‘신위(神衛)’가 절대적 평화론의 근간이 된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의 평화론은 확실히 기독교적 세계관에 서 있었다. 이런 식으로 기독교는 일본 내 평화주의의 한 축을 담당했다. 또 다른 한 사람이 가가와 도요히코였다.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 1888-1960)는 특히 실천적인 면에서 돋보였다. 평생 가난한 노동자, 농민을 위한 사회활동과 협동조합운동, 빈민을 위한 주택과 병원 설립 활동 등을 통해 근대 일본의 인간화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1921년 일본 고베시의 인구가 63만 명이던 시절, 3만5천명의 지역 노동자들을 규합해 비폭력적 대규모 파업을 주도하는 등 노동쟁의에 앞장서기도 했다. “재화를 존경하는 사회를 변화시켜 인간을 존중하는 사회로 환원시켜야 한다”는 취지였다(로버트 실젠, 2018: 159). 가가와는 협동조합운동을 처음으로 조직하고 활성화시켜 세계 최대의 서민복지 생협인 ‘코프고베’로 키웠으며, 1930년대 미국 협동조합 지도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실천의 동력은 기독교 신앙이었다. 로버트 실젠(Robert Schildgen)은 그의 실천의 동력을 “심오한 신비주의”(profound mysticism)라고 규정하면서, 그것을 인간, 창조물, 창조자에 대한 가가와의 비밀스러운 애정과 경의의 표현이었다고 요약했다(로버트 실젠, 2018: 12). 가가와는 계급, 인종, 종교, 국적 등을 차별의 수단으로 삼으면 폭력도 정당화될 뿐만 아니라 증폭된다면서, 인간 평등사상에 기반한 반전, 비폭력, 반군국주의적 입장을 늘 강변했다. 1954년 미국이 태평양에서 핵실험을 했을 때, 그는 여러 경로를 통해 반전을 외치고 반핵 운동을 도모했다.
평화에 대한 그의 관심은 패전 후 성립된 「일본국헌법」, 이른바 ‘평화헌법’ 만큼은 어떤 희생을 치루더라도 준수해야 한다고 강조한 데서 더 잘 드러난다(로버트 실젠, 2018: 485). 전쟁 포기 조항(특히 헌법 9조)이 세계평화의 이정표가 될 것이라면서, 일본이 세계의 정치적 갈등을 중재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반전 평화의 희망을 가지고 세계정부 혹은 세계연방의 수립을 꿈꾸었고, 세계를 ‘하나의 몸(one body)’으로 만들기 위한 국제적인 경제협동조합운동을 주창하기도 했다(로버트 실젠, 2018: 470-479). 주요 열강들에 의해 좌우되는 UN에 대해서는 점차 기대를 점차 접으면서도, 새로운 세계연방 혹은 세계정부의 성립에 대한 기대는 늘 주장하고 견지했다.
작가, 설교자, 정치고문, 사회복지사, 행동주의자의 삶을 살았던 가가와는 이미 생전에 세계적으로 유명인사가 되었다.5) 그 기초에는 평화주의가 있었다. 그는 생애 마지막 십년동안 평화의 세계 질서(world order of peace)를 수립하기 위한 운동에 집중했다. 그에게 세계 평화는 신앙의 근간인 사랑을 통해 발현되는 정의의 구체화였다. 생시에 노벨평화상 후보에 두 번이나 올랐던 그는 이런 유언을 남기고 타계했다: “교회를 건강하게 해주세요. 일본을 구원해주세요. 세계에 평화가 오게 해주세요.”(로버트 실젠, 2018: 499)
그의 평화 지향적 삶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한 때 기독교인이자 동시에 애국자가 될 수 있다며 천황을 두둔하기도 하고, 일본을 아시아 해방을 위한 영웅이자 서양 제국주의에서 아시아를 지키는 수단으로 간주하기도 했다(로버트 실젠, 2018: 342-354, 388-398). 이로 인해 평화주의자들의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기독교 신앙에 입각한 사회주의적 실천가이자 평화운동가로서의 면모를 잃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론만이 아닌 실천으로 일관된 그의 평화지향적 삶은 돋보인다.
지금껏 본대로 일본에서 평화 담론을 주도해온 두 축은 고토쿠와 같은 사회주의자와 우치무라와 같은 기독교인이었다. 이시바시 단잔과 같은 니치렌슈(日蓮宗) 계통의 평화주의자도 있었지만,6) 규모로는 기독교인이 많았다. 가가와 같은 이는 천황제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많은 사회주의자나 기독교인들은 군국주의나 국가주의에 근저에 천황제가 있다고 보고서, 최종적으로는 천황제의 해체 없이 평화의 실현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공유했다(纐纈厚, 2009: 143). 천황제는 오늘날까지도 일본 사회에서 공론화시키기 힘든 주제이다. 일본적 평화의 내면을 속속들이 이야기하기도 쉽지 않다는 뜻이다. 일본에서 평화 담론이 탁 트인 광장으로 나오기 힘든 근본적인 이유에 메이지 시대 이래 강력하게 자리잡아온 천황제가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이처럼 근대 일본에서 전개된 평화주의에는 분명히 한계도 있다. 다음 장에서 좀 더 보겠지만, 천황에게 전쟁의 책임을 묻지 않는, 아니 물을 수 없는 사회 구조는 일본적 평화주의의 근본적 한계를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다. 그와 함께 메이지 이후 패전에 이르기까지 침략과 전쟁으로 점철되던 시절에 많은 이들이 그저 무력하게 군국주의와 전쟁에 동화되던 상황은 일본 평화운동의 한계를 잘 보여준다. 이와 관련하여 고케츠 아츠시(纐纈厚)는 그 한계와 이유를 일본 문화와 연결해 이렇게 분석하고 있다.
“종교성을 띠고, 사회적 연줄이 강하고, 이질성 거부와 동질성을 무조건 편향 지향하는 성향이 강한 일본 사회에서 이러한 현실을 돌파할만한 사상적 에너지, 설득력 있는 평화 사상을 끝까지 만들어 내지 못한 점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일본 사회에서는 개인에 대한 정치적 압력이 매우 강력하고 강력한 만큼 정치적으로 더 소외되는 두려움 때문에 이른바 소외 회피 욕구도 강하며, 그 결과 권력에 의해 위로부터 쉽게 통제 및 관리되는 정신적 상황이 마련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일본인들이 군국주의나 국가주의의 통제·관리·동원이라는 범주 속으로 흡수되어 간 것이다.”(纐纈厚, 2009: 143-144)
일본에서 평화 운동이 주류가 될 수 없었던 이유에 대한 무난한 분석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에서의 평화론을 ‘현실에서의 대국주의적 팽창 정책‘에 대한 ‘소국주의라는 이상적 대안’으로 대별해 정리한다면, 현실은 늘 자국중심의 대국지향주의에 따랐다. ‘이상으로서의 평화주의’와 ‘실리(實利)로서의 평화주의’라는 말로 구분한다면(纐纈厚, 2009, 147), 최근까지도 현실에서는 실리 중심의 자기 충족에 머무는 경향이 있다. 고케츠가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있듯이, 일본의 평화사상은 오랫동안 “전쟁국가의 특징으로서 과도한 권력의 일원적 집중, 단순한 가치관의 강제, 국민의 권력 감시 시스템의 결여, 종합하건대 민주주의 사상과 운동의 부재 등” 뚜렷한 한계를 보였다는 것이다(纐纈厚, 2009: 130-131, 147).
더 비판적으로 분석한다면, 일본 역사는 ‘대국주의’, ‘실리’ 등의 말로는 전부 담을 수 없을 군국주의적 폭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강상중(姜尙中)이 일본의 평화는 늘 군사문화와 공존한다며 규정한 “군사범벅 평화”(軍事まみれの平和), 윤건차(尹健次)가 일본은 다른 나라에 대한 우월의식과 소수자에 대한 차별의식에 대해 둔감하다며 규정한 “고절의 평화”(孤絶の平和)도 일본적 상황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흐름과 경향은 전후에도 본질적으로 달라졌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의 평화 운동이 실패했다거나 좌절로 끝났다고 할 수는 없다. 평화를 향한 적극적 외침은 유사 이래 인류에게 소수자의 몫이었고, 사회의 지속적 주류가 되어 본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회의 주류가 ‘자기중심적 평화주의’(ego-centric pacifism) 또는 ‘실리로서의 평화주의’에 머물러온 역사는 일본만의 특징도 아니기 때문이다. 소수 소국주의적 평화 이상주의자들이 양적으로는 대국주의적 흐름에 패배하는 모양새이지만, 질적으로는 일본 사회에서 늘 새로운 힘을 잉태하며 평화로 이끄는 동력으로 작동해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흐름 내지 구도는 전후 일본 사회에도 여전히 적용되고 있는 중이다.
Ⅴ. 20세기 중반 이후 평화 연구, 평화 개념의 다양화
패전 후, 특히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인류 최초의 피폭체험을 했던 일본인에게 평화가 핵군축, 핵무기 및 핵발전소 폐기 등과 연결되어온 것은 자연스럽다. 이러한 핵문제를 포함하면서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근본적인 평화담론의 핵심은 ‘반전(反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전쟁기에는 ‘비전’이라는 용어가 그 못지않게 사용되었지만, 반전과 의미상의 차이는 크지 않았다. 「일본국헌법」에 ‘전쟁방기’, ‘군대비보유’, ‘교전권의 부인’ 및 ‘평화 속에서 생존할 권리’ 등이 명시되어 있듯이, 전쟁 포기와 군대 비보유가 일본적 평화실천의 전형적인 핵심으로 간주되어온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그리고『세계』(世界) 같은 유력 잡지들이 1949년에 “전쟁과 평화에 관한 일본 과학자들의 성명”을 게재하는 등 전쟁과 평화의 문제를 다루었는데, 이것은 평화를 반전 혹은 비전으로 이해하는 당시 식자층의 분위기를 잘 반영해준다. 일본 평화담론의 주류는 갈퉁(Johan Galtung)이 이야기하는, ‘물리적 폭력이 없는 상태로서의 소극적 평화’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헌법의 기본정신이라 할 수 있을 평화주의가 일본의 주체적인 선택만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도 없다. 헌법전문에 명기된 ‘평화 속에서 생존할 권리’를 위시하여 제9조에 구체적으로 명기된 반전 및 평화주의적 자세는 전범국에 대한 연합군의 징벌적 비군사화정책에 기인하는 것이면서, 천황의 전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일본정부의 제안과 동북아 군사질서를 재형성화려는 맥아더의 정치적 합작품이었다(纐纈厚, 2009: 155; 이경주, 2002: 159-160 참조). 전범 재판 역시 일본을 아시아의 새로운 동맹자로 삼으려는 미국의 의도가 반영된 작품이었다는 평가가 크다. 실제로 전쟁 이전 외무대신이었으면서(1913-1931) 친구미 노선을 걸으며 일본의 패권국가화에는 소극적이거나 비판적이었던 시데하라 기주로(弊原喜重郞, 1872-1951)는 도리어 그런 전력 때문에 연합군에게 평화주의자로 비치면서 1945년 10월 수상으로 취임했다. 시데하라가 천황을 상징적 존재로 천명하고 헌법안에 전쟁 포기를 선언하는 내용을 처음으로 제안했고 당시 점령군 사령관 맥아더가 이 안을 적극 평가하면서 「일본국헌법」(1946)이 만들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시데하라는 일본의 ‘비무장 평화국가화’를 추구했다고 할 수 있다(纐纈厚, 2009: 145-146). 이것은 패전 후 연합군이 점령해있는 상황에서 일본의 생존을 위한 피치 못할 전략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다른 한계는 이러한 헌법에 대해 상당수 일본 국민이 지지하면서도, 하야시 히로후미(林博史)가 냉철하게 비판하고 있듯이, 개인의 책임을 자각하지 못한 채 헌법9조만 지키면 된다는 식의 추상적 평화주의에 머물러왔다는 것이다. 헌법9조를 개정해 군사력을 강화하려는 보수 세력이나 헌법9조를 옹호하려는 혁신 세력 모두 일본의 전쟁 책임과 식민지 책임에 대해, 특히 개인적 차원에서 정면으로 맞서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전후 일본의 평화주의는 사실상 “책임 없는 평화주의”였다는 것이다(하야시 히로후미, 2012: 5, 69-76).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본대로 일본의 평화 지향적 흐름은, 비록 주류는 아니었지만, 메이지 시대부터 면면히 때로는 강렬하게 이어져온 것이기도 하다. 기존의 평화주의적 흐름의 연장선에서 전후에는 전쟁을 반대하는 과학자들의 모임인 ‘평화문제 담화회’(1949)와 그 후속 모임(‘평화문제 간담회’, 1964) 등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러셀과 아인슈타인 등 서구의 학자들이 핵무기 폐기를 선언한 ‘과학과 국제정세에 관한 퍼그워시 회의’(1957)를 모델로 ‘과학자 교토회의’ (1962)도 열렸고, 추후에 사회과학자들도 참여해 군비철폐를 주장한 ‘교토 퍼그워시 회의’(1975)도 개최되었다. 미국과 유럽의 평화 연구에 영향을 받으며 ‘도쿄 평화연구 그룹’(1964)과 ‘일본 평화연구 간담회’(1966)도 형성되는 등 일본에서 평화에 관한 연구는 아시아에서는 가장 선구적이고 밀도 있게 진행되었다. ‘일본평화학회’(1973)가 설립되어 기관지『평화연구』를 발행했으며, 기독교계 대학인 시고쿠학원대학(四国学院大学)에서 최초로 ‘평화학과’를 설립하는 등(1976) 수십 개의 대학에서 평화학 관련 강좌와 평화 연구소들이 설립되었다. 이런 식으로 평화 관련 연구, 교육, 출판 등이 다양하게 이루어져 왔다.
그런 점에서 이른바 평화헌법이 전후 일본 내 민주주의의 확립에 공헌했던 것은 분명하다. 유럽과 미국의 평화연구 결과를 대폭 수용하면서 평화가 반핵, 군축, ‘분쟁 규제’, ‘분쟁 해소’ 등의 차원으로 세분화했고, 종교계도 평화운동에 적잖게 동참했다. 가령 일본 신불교인 릿쇼코세이카이(立正佼成会)를 위시해 여러 종교인 및 종단들이 협력해 창립한 ‘세계종교인평화회의’(WCRP, 1970년~)라는 세계 종교 회의체에 ‘평화’라는 말이 들어가 있고, 평화 관련 많은 자료들을 출판한 데서 알 수 있듯이, 기독교계는 물론 불교계 종단들도 반핵, 군축, 반전 등을 외치기도 했다. 비록 모든 종교계가 한 목소리를 낸 것은 아니지만, 소수의 평화주의자들이 그랬듯이, 일부 종교계의 평화 메시지도 일본 내 평화담론의 확대에 공헌했다. 물론 이것은 기독교계 인사를 중심으로 반전, 반군국주의, 나아가 천황제 반대를 도모하던 역사의 연장이라고 해도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 운동은 다른 시각에서 보면 전 세계적 냉전 체제를 강화시키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가령 전후 일본의 제3차 요시다 내각(吉田內閣, 1949.6-1950.2)은 국제적으로 냉전 체제가 윤곽을 드러내는 상황 속에서 미국과 연계하며 반공주의적 ‘강화(講和)’를 지향했다. 미군 점령 체제를 끝내고 평화조약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중국이나 러시아를 제외한 단독 강화가 미일 간 대세가 되었다. 일본 정부의 반공주의적 평화주의가 미일과 중소를 축으로 하는 냉전 체제를 만드는 데 기여한 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비판하면서, 전후 일본에서 최고의 지성으로 평가받는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 1914-1996)는 공산주의 계열을 배제하는 단독 강화 움직임에 반대했다. 물론 전체주의적 공산주의도 비판했지만, 공산당이나 사회당도 포섭할 수 있을 때 이제 씨가 뿌려지고 있는 민주주의도 뿌리를 내릴 수 있다고 보았다(松澤弘陽·植手通有, 1995-1997: 333). 이러한 마루야마의 입장은 단독 강화를 추구하는 보수주의적 정부와 공산 계열 양쪽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지만, 마루야마는 두 세계의 ‘공존’을 중시했다. 미·소를 중심으로 하는 냉전적 양극체제에 반대하며 아시아는 제3의 길을 가야 한다고도 보았다. 한 가지 입장에서 전체를 지배하려는 태도는 설령 미국식 민주주의라고 해도 전체주의적이기는 마찬가지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두 세계의 공존이 일본이 걸어야 할 길이라는 것이었다.
특히 좌·우 모두 민족주의에 호소하고 있다는 점에서 민주주의는 좌·우익 민족주의를 포섭하는 민주주의여야 하며, 좌(左)보다도 더 좌(左)의 길, 즉 전체주의적 좌의 길을 넘어서는 민주주의적 좌(左)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보았다(松澤弘陽·植手通有, 1995-1997: 110-113). 그에게 평화는 공존의 다른 언어였던 셈이다. 나아가 정부의 친미적 선택이 또 다른 전쟁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고 비판하며 반전(反戰)의 입장을 견지했다는 점에서 전력불보유와 전쟁포기를 천명한 이른바 ‘평화헌법’과 같은 맥락에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여러 차례 전술했지만, 이러한 입장은 소수였다. 주류는 일종의 ‘힘에 의한 평화’를 지향했다. 기존의 자기중심적 영향력을 국내외적으로 확장시켜갈 때 대중은 박수를 쳤다. 군국주의적 팽창의 본질은 늘 가려졌다. 이처럼 평화 의식이 사회적으로 자리 잡지 못하고 있는 근거의 하나가 ‘종전’(終戰)이라는 용어다.
‘종전’은 일본 주류의 속내를 보여주는 언어다. 일본인에게 익숙한 용어는 ‘패전(敗戰)’이 아니라 ‘종전(終戰)’이다. 여기에는 천황제에 기초한 일본무류성(日本無謬性) 같은 정서가 놓여있다. 자신에게 패배를 안긴 미국에 대해서는 종속적이다 싶은 자세를 취하는 데 비해, 자신의 침략으로 인한 피해자에 대해서는 가해자 의식이 크지 않다. 전쟁에서 진 것[敗戰]이 아니라, 그저 전쟁이 끝났다[終戰]고 생각하는 일본인의 무의식 안에 전쟁의 원인에 대한 반성, 피해자에 대한 사죄의 마음은 상대적으로 적다. 그런 점에서 일본적 평화의 주류는 여전히 일본 중심적이다. 이런 사실을 비판적으로 의식하며 젊은 정치학자 시라이 사토시(白井聰)는 “순연한 패전을 종전으로 바꿔 부르는 기만이 전후 일본 체제의 근본을 이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단언한다(시라이 사토시, 2017: 52). 패전 사실을 무의식 속에 은폐하고, 주변국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과정이면 충분하다는 생각은 전전의 권력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속내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기만은 아베 정권에서 내세우는 ‘적극적 평화주의’라는 교묘하고 적극적인 말로 나타난다. 이 말은 갈퉁의 ‘적극적 평화’ (positive peace)와 같은 의미가 아니다. 평화학계에서 흔히 쓰는 positive pacifism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베 정권의 ‘적극적 평화주의’는 영어로는 proactive peace strategy 또는 proactive contribution to peace로 표기한다. 일본이 헌법9조에 명기하고 있는 전력불보유 및 전쟁포기라고 하는 전후 체제를 벗어나, 집단자위권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사실상 전쟁할 수 있는 ‘보통국가’로 가기 위한 전략, 다시 말해 ‘일본 중심의 평화를 위해 사전적으로 취해지는 전략’을 의미한다(남기정, 2014: 101). 선제공격마저 가능한, 일종의 ‘힘에 의한 평화’를 달성하겠다는 것이다. 3.11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한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파 이후 한편에서는 핵폐기 운동 중심의 평화운동이 더 활발해졌지만, 핵무기로 ‘패전’했다는 사실은 공론화되지 않는 현실적 편협함의 연장이라고도 할 수 있다.
Ⅵ. 나가는 말: ‘공기’의 창조로서의 평화
문화평론가 야마모토 시치헤이(山本七平, 1921-1991)는『공기의 연구』(空氣の硏究, 1977)라는 명저를 남긴 적이 있다. 일본인은 ‘공기’(‘분위기’보다 강도가 세고 농도가 짙은 말)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 그 요지다. 일본인은 다분히 주변의 분위기에 따라 행동하는 경향이 크다는 것이다. 한 극단적인 사례로 야마모토는 일본 육군의 하급 장교로 태평양전쟁에 참여했다가 느꼈던, 일본 제국주의의 콤플렉스를 든다. 그저 ‘공기’에 따라 무모하게 미군과 전쟁을 감행하는 제국주의적 태도는 사실 일본의 깊은 콤플렉스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저 관습대로 움직이다가 극한 상황에서는 자기 보호를 위해 스스로 사고를 정지시키고, 가상의 현실을 만들어 그 가상과 싸우는 군인의 모습이 그 한 사례라는 것이다(야마모토 시치헤이, 2016: 126). 일본은 애당초 미국과 전쟁하는 법을 모른 채 가상의 미국을 현실의 미국으로 여기며 전쟁을 벌였다는 것이다. 이런 모습을 보며 야마모토는 일본이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한 것이라기보다는, 현실에서 미군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받고 허구의 세계가 산산조각나자 그냥 항복해버린 것이라고 말한다. 패할 것이 뻔한 데도 싸워야만 할 것 같은 ‘공기’에 따라 전함을 출전시키고, 별 대책 없이 침몰해버리고 마는 모습에서 일본이 벌인 전쟁의 실체도 사실은 ‘공기’에 있었다는 사실을 읽어내고 있는 것이다(야마모토 시치헤이, 2018: 22-29).
그는 이차대전의 패전국인 독일과 일본이 전쟁 범죄에 대해 취하는 태도가 달랐던 이유도 여기서 찾는다. 일본인은 모든 잘못된 결정의 책임을 ‘그럴 수밖에 없었다’며 일종의 ‘공기’에게 맡긴 뒤, 미국이 만들어 놓은 새로운 공기의 명령에 따라 전후에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고 지금은 그렇지 않을뿐더러 지금의 자신이 한 것도 아니니 새삼스럽게 패전에 대해 사과를 해야 할 명분도 덜 느낀다는 것이다. 천황이 항복을 선언하는 날 도쿄가 도리어 차분하기도 했다는 것도 이제는 공기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수용하는 데서 오는 행동이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공기가 인공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야마모토 시치헤이, 2018: 31-34) 야마모토는 메이지 유신 이후 첫 번째 대규모 내전이었던 세이난 전쟁(西南戰爭, 1877) 당시 ‘반란군은 불의하고 잔학한 집단’이지만 ‘관군은 정의롭고 자애로운 집단’이라는 일종의 프레임으로 관군을 절대화하고 천황을 신격화하면서 ‘공기의 지배’가 완성되었던 사례를 든다(야마모토 시치헤이, 2018: 59-66). 일본인은 일종의 프레임 정치에 영향을 많이 받는 셈이라고나 할까.
이 말은 프레임 정치에 저항하고 이른바 공기를 바꾸는 것도 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일본의 평화주의자들이 희망을 걸었던 것도 이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평화주의자들은 기존의 공기에 저항하고 새로운 공기를 형성하려고 했던 이들인 셈이다. 물론 “공기에 저항하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에너지를 소비해야 하는 작업이다.”(야마모토 시치헤이, 2018: 36) 군국주의적 전쟁에 저항하는 것도 참으로 대단한 에너지를 소비해야 하는 작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에너지를 소비하면서 새로운 사회를 만들려고 시도했던 이들이 일본의 평화주의자들이다.
근세 이래 일본에서 평화를 반전, 반군국주의, 비핵화 등으로 규정할 수 있었던 것은 ‘공기’를 거스르며 ‘대단한 에너지를 소비’하던 평화주의자들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로 인해 일본에서 지난 백수십년 상상해온 평화는 비전/반전, 반군국주의/반제국주의, 반핵/비핵화라는 사실을 읽어낼 수 있다. ‘반’(反), ‘비’(非) 등의 부정 언어는 기존의 공기를 바꾸려는 저항의 언어로서, 평화가 대단한 에너지를 써서 저항할 때 쟁취되는 세계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저항 때문에 자유, 민주, 정의, 평등 등의 가치가 평화의 이상적 상태라는 공감대가 확보된다는 사실도 일본의 평화주의자들이 잘 보여준다. 비록 주류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일본에서 전개되어온 평화의 개념이 한낱 관념에 머물지 않고, 역시 평화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정치적 우경화가 도리어 위장된 평화, 사실상 폭력이라는 사실을 폭로하는 역동적 근간인 것이다.